진여향 2007. 5. 18. 13:48
[기복불교, 도인 불교, 밝은 불교]


우리나라 불교의 문제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기복불교와 도인불교의 폐해도 생각보다 훨씬 깊은 것 같습니다.

 
우선 기복불교는 겉모습은 불자이지만 속마음은 불자가 아닌 듯합니다.

 

부처님께 절을 하고 부처님을 흠모하지만,

속에는 온통 복 받을 생각만 가득합니다.
그러니 기도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기도도 잘만하면 훌륭한 수행이 되는데도,

그런 기도는 결국 욕심 성취 이외의 세상은 보여 주지 못합니다.

 

또 그런 마음은 결국 어느 도량이 기도발(?)을 잘 받는다,

혹은 어느 스님이 기도를 잘한다, 하는 말이 들리면 하루 아침에

기도처를 바꾸는 그런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은 타 종교인들의 유혹에도 쉽게 귀가 솔깃하십니다.

타 종교인들이 감언이설로 자기 종교의 복덕의 우수성을 강조하면 솔깃, 하시어 쉽게 개종하기도 하십니다.

 
도인불교는 그러한 기복불교를 무척이나 혐오(?)합니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요 깨닫는  가르침이지

복을 구하는 가르침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마음이 지나쳐 복을 구하는 분들을

아주 비웃고 폄하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복을 구하는 것 역시 엄연한 불교 공덕 중의 하나인데도

복을 아주 '몹쓸 것'인 듯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기복 불교와 마찰을 일으키고,

기복불자들을 더욱 기복으로 몰아 넣는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이런 견해가 지속되는 한

기복불교와 도인불교의 화합은 요원한 것처럼 보입니다.

 

기복불교는 끝없이 눈앞의 현실만 집착하게 하고,

도인불교는 끝없이 이상만 쫓게 합니다.

그리하여 기복불교는 끝까지 현실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고,

도인불교는 한없이 현실을 회피하게끔 합니다.

둘 모두 양변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복불교와 도인불교가 만나는 길을 무엇인가?

두 가지의 단점을 교정하는 불교는 없는가?

제가 볼 때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밝은 불교'입니다.

밝은 불교로 나아갈 때 기복은 기복대로 빛나고

도인불교는 도인불교대로 또한 빛을 발하리라 봅니다.

그리고 두 불교는 서로 하나 되어 만날 것입니다.

 
기복불교의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밝은 삶 아니겠습니까?
복을 구한다는 것은 결국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것이고,

그것은 바로 밝은 삶을 의미한다 할 것입니다.

 

도인불교의 목적 또한 무엇이겠습니까? 

그 역시 밝은 삶 아니겠습니까?
깨치지 못하면 결국 뒤바뀌어진 망상과 번뇌의 어둠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한사코 깨치자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말은 바로 영원한 밝은 삶을  살고 싶은 염원에 다름 아니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기복불교와 도인불교는

밝은 불교에서 서로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 됩니다.

 

밝게 살 때 복이든 깨달음이든 당연히  오게 되어 있는 것.

그런데 밝은 삶은 살지 못하면서

복 또는 깨달음에 집착하여 그런 것들만 구해 본들,

어찌 참다운 복, 참다운 깨달음이 올 수 있을까요?

 
그러니

'업장소멸 소원성취' 문구를 내건 기도처에는 사람들이 넘치고,
한편으로 깨달음을 찾는 분들은
대사회적 관계를 단절하며

자폐증 환자처럼 자꾸 당신의 내면 속으로만 한사코 들어가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복불교를 하든 도인불교를 하든,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밝은 불교'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보현보살마하살

 

普賢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