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明속의등불~★/洗 心 說(법문)

무한경쟁 하지 말고 무한상생하세요-고우스님

진여향 2007. 8. 17. 08:24

겨울의 태백산은 고요하다.
바람만 좀 속삭일 뿐이다.
태백산 각화사 왼편으로 난 샛길을 10분쯤 따라가면 작은 토굴
‘서암(西庵)’이 기다리고 있다.
‘용맹정진’의 상징인 봉암사 결사를 재건하고 40여년간 치열하게 수행한 고우스님의 수행처.
이력이 무색하게 거처는 소탈하기 그지없다.
방과 부엌이 전부.
지난해 봄 각화사 태백선원장에서 물러난 스님은 이곳에서

70에 이른 노구에도 손수 밥 짓고 빨래하며 살아간다.
“젊은 날 폐병에 걸려 요양차 절에 들렀다가 그대로 출가하게 됐어요.
그냥 평범한 승려입니다.”

바깥세상은 한푼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엄살’로 북새통인데,
산도 집도 사람도 아무도 ‘내 몫’에 연연하지 않는 풍경이 이채롭다.

불교가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스님은

“바른 견해에 눈뜨는 것(正見)”이라고 운을 뗐다.
“정견은 세계의 구성원리인 연기(緣起)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엔 독립적인 실체란 없고 서로 연결지어져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드러냅니다.
집을 예로 들어볼까요.
다양한 재료가 모여 집이라는 통일된 형상을 구성합니다.
지붕이나 외벽, 섬돌을 따로 떼어놓고 집이라고 할 수 없죠.
이들이 모여 집이 되고 집이 됨으로써 각각의 특성과 기능이 드러납니다.
중도(中道)도 연기와 같은 맥락입니다.
양 극단과 중간마저도 초월한 자리에서 조화롭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불교는 모두의 행복을 여는 지혜
깨달음의 사회화가 곧 수행
보수.진보 한쪽만 대변하면 ‘독재’


-중도를 잘못 이해해 중용이나 절충주의로 혼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흑백이 싫다고 회색을 고수하는 격이지요.
문경 봉암사의 뒷산은 봉암사에서 바라보면 돌산입니다.
절 뒤로 돌아가서 보면 숲산이죠.
서 있는 위치에 따라 한 사람은 산이 돌산이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숲산이라고 우길 것입니다.
이들이 집을 짓는다면 각각 돌집과 나무집을 짓겠죠.
그리고 아마도 둘다 그다지 잘 지은 집이라곤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산의 두 가지 다른 면을 두루 발견한 사람이 세운 집은 어떨까요.
돌과 나무의 장점을 잘 이용한 가장 아름답고 편리한 집이 되겠죠.”


-윤회.무아의 지루한 논쟁도 연기법에 입각하면 쉽사리 결론이 난다고 들었습니다.


“실체가 없는 모든 존재가 윤회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 윤회를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를 놓고 논란이 잦았습니다.
윤회의 주체는 제8식인 아뢰야식입니다.
그러나 이 아뢰야식 조차 연기된 현상이므로 무아(無我), 공(空)인 것입니다.
무아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윤회에 대한 설명이 가능한 셈이지요.”


연기를 깨달으면 나 그리고 우리가 모두 부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짚으로 가마니를 만들고 짚신을 삼고 새끼를 꼬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직업과 습관, 처지에 따라 본래 짚이란 사실을 까맣게 잊고

각자 가마니, 짚신, 새끼에만 매달립니다.
대부분 이렇게들 삽니다.
그러나 내가 없다고 해보세요.
세상 전부를 얻습니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또 있겠습니까.
내가 부처이면 남도 부처입니다.

부자, 가난한 사람, 부자니까 잘 보여야 할 사람, 가난하니까 멀리 해도 괜찮은 사람…
편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미혹을 걷어내면 모두 ‘사람’일 따름이죠.
나와 너의 경계가 사라지면 모두가 부처, 사해가 한 식구입니다.
곧 불교는 너와 나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지혜와 능력을 키워줍니다.”

진실에 깃들지 않은 믿음은 ‘억압’ 아니면 ‘자기기만’이다.
진실을 알기위해 수행한다.
스님은

“수행의 목적은 ‘본래부처’라는 믿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체험에 나서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수행은 체험을 통해 믿음을 완성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일상 속에서 드러내는 일입니다.
모든 생명을 부처님처럼 고귀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대할 때 비로소 세상이 맑아집니다.
깨달음의 생활화.사회화가 바로 수행입니다.”


-‘자기가 없다’는 진실을 ‘자기를 죽이라’는 명령으로 곡해해 불교는

무조건적 희생을 높이 사는 종교라는 폄훼도 보입니다.

“중국의 대석학 임어당의 주장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무아, 공만을 내세우니 불교는 허무의 종교라는 것이죠.
특히 ‘외부현상이나 조건을 부정하라고 가르치니 재산도 가져서는 안된다.
결국 불자들은 모두 거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억측입니다.
불교는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 현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중요함을 지적합니다.
부처님은 거부였던 제자 수달타가

“자신이 가진 재산이 수행에 방해가 되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겠다”고 하자 만류합니다.
“너는 이미 돈에 얽매이지 않을 만큼 정각을 이뤘으니
네가 보관하고 올바른 목적으로 사용하라”고 가르치지요.
내가 재산과 명예를 다스릴 줄 알면 명리(名利)는 있든 없든 무의미합니다.
다만 주체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순간 재앙이 됩니다.
불교는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행복한 현실, 다같이 잘 사는 현실을 지향하지요.
그리고 그러기 위한 지혜를 일러줍니다.


-수행을 하다보면 삼매(三昧)에 든다고 합니다.
삼매는 무엇입니까.


“삼매는 주.객관을 초월한 멸진정(滅盡定)의 상태를 뜻합니다.
심지어 스님과 저명한 불교학자들까지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와 일치가 될 때’를 삼매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오류입니다.
살생의 행위와 마음이 일치되면 이것도 삼매라고 해야겠습니까.
더구나 행위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합니다.
사유에는 사유주체(주관)와 사유대상(객관)이 갈라지기 마련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나’와 ‘너’가 갈라져 본래부처임을 깨닫는 경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리가 뭐냐고 묻자 선사들이 ‘뜰앞의 잣나무’ 혹은 ‘똥막대기’라고 일갈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사유의 일반적 속성을 끊고자 한 칼날같은 말입니다.
주(나).객관(너)의 구분을 타파해 순식간에 본래부처를 깨우치라는

‘일촌즉입여래지(一寸卽入如來智)’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남과 다른) 내가 있다’는 착각이 일생을 그르치고 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생명에 해악을 끼친다.
“서구문명은 철저하게 ‘내가 있다’는 대전제에서 출발했습니다.
‘다름’과 ‘타인’을 용납하지 않는 그런 생각이 종교전쟁과 자본주의를 잉태했죠.
유아론적 사고의 끝은 불행입니다.
막대한 전비를 들여 이라크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한 뒤

또다시 테러를 당할까 전전긍긍하는 미국의 현주소를 보십시오.” 

저간의 사정 탓에 새해의 일출이 희망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여야의 ‘짓무른’ 갈등도 여전하고 경제불황도 난제다.
과연 반목의 불덩이는 꺼질 수 있을까.
고우스님은 최근 유일하게 바깥소식을 접하게 해주던 신문마저 끊었다.

“아무리 옳은 주장이라도 집착하는 순간 편견이 됩니다.”


-4대 입법을 두고 한 쪽은 ‘개혁입법’,
다른 쪽은 ‘국민분열법’이라며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습니다.


“중도의 가르침이 누구에게보다 절실한 사람들이 정치인들입니다.
보수나 진보 한쪽만을 대변하면 그것은 또다른 독재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정책에 동의하는 국민들과만 축배를 들고 나머지 국민은 버리고 가겠다는 말입니까.
‘역사적 과제’라지만 역사도 현실의 연속입니다.
현실을 외면한 역사는 진정한 가치를 상실하고 맙니다.
물론 대안도 내놓지 않은 채 무조건 반대만을 외치는 사람들도 자성해야 합니다.

전체의 틀에서 고민해야죠.”

-불황에 임하는 우리의 태도를 묻고 싶습니다.


“부처님 당시 남의 집 변소의 똥물을 퍼주며 살아가는 니제라는 최하층 천민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과 정면으로 마주치자 니제는 자신이 더럽고 천하다 여겨 앞에 도망치고 맙니다.
니제를 돌려세운 부처님은

 ‘국왕이라도 나쁜 마음으로 백성을 괴롭히면 천한 사람이요 똥을 푸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소임을 다하고 착한 마음으로 살면 고귀한 사람’이라고 격려합니다.
외부환경이 쓰든 달든 구애받지 말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십시오.”


스님은
“성공이란 미명 하에 책상에 38선을 그어놓고,
다투고 상처받던 어린 시절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은 아니냐”
고 묻는다.
“무한경쟁으론 희망이 없습니다.
‘무한향상(無限向上)’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