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뭘까?…물음으로 몰입하는 것이 道” / 명진스님
“나는 뭘까?…물음으로 몰입하는 것이 道” / 명진스님
(봉은사 주지)
일주일 째 계속되는 한파가 절정을 이룬 날이었지만 법당은 발디딜 틈 없이 꽉 찼다.
스님은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 아침부터 법회에 참석한 신도들을 위한
덕담으로 법문을 시작했다. “출가하면 처음 배우는 <초발심자경문>에 이르기를
‘배슬(拜膝)이 여빙(如氷)이라도 무연화심(無戀火心)하며,
아장(餓腸)이 여절(如切)이라도 무구식념(無求食念)이니라’했습니다.
절하는 무릎이 얼음과 같을지라도 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며,
굶주린 창자가 끊어질 듯 하여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공부는 간절하게 해야한다는 뜻인데 따뜻한 방안에 누워 TV를 보는 유혹을
뿌리치고 이 추운 겨울 여기까지 오신 것만으로도 이미 큰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는 것이 바로 수행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법회에 참석하신 것을 정말 감사드립니다.”
스님은 인사로 서두를 연 뒤 부부 동반 참석자들을 불렀다. 꽤 많은 사람이 손을 들었다.
법회에 늘 가족이 함께 참여하라고 권유하는 스님은 이날 법회에서
부부 동반으로 참석한 신도들에게는 <몰입>(황농문 저)이라는 책을 선물했다.
가족이 전부 참석한 신도들도 적지 않았는데 이들에게는
<운명을 바꾸는 법>(요범사훈 강설)이라는 책을 보시했다.
물론 ‘나홀로’ 참석자들도 마침 동춘스님이 보시한 책을 선물받았다.
“<몰입>은 불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황농문 교수가 자신이 공부하는데
어떻게 집중하고 몰입했는가를 경험에 의거해 과정과 방법을 자세하게 서술한 책입니다.
그런데 이걸 우리가 마음 공부하는데 대입시켜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 가을 산철 결재 때도 여러 번 봤을 만큼 좋아서
마음공부하는데 보탬이 되라고 드리는 겁니다”라며 책 선정 이유를 소개했다.
스님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어제 밤을 새며 좋은 글귀를 적었습니다.
수행자가 좋은 글귀를 적어 주면 ‘부적’과 같은 효험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글씨를 잘 못쓴다고 생각하는데 누구는 명필이라고 하더군요.” 웃음이 터졌다.
유머가 풍부하고 대중 연설력이 탁월한 스님의 언변은 법회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스님은 특히 자랑을 자랑으로 들리지 않게,
‘시주’를 권유하면서도 받아들이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남다른 능력을 보였다.
“책을 그냥 주면 잘 안보니까 책값 낼 기회를 주겠습니다. 오늘부터 동지기도 입재를 합니다.
동지는 말 그대로 겨울이 끝에 다다랐다. 다했다는 말입니다.
음이 다하고 양이 싹 트기 시작하니까 실제로는 새해가 시작된다고 해도 되는 겁니다.
이를 맞아 달력을 보급하는데 달력 보시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한 기금으로 쓰게 됩니다.
달력값이 2000원이지만 꼭 그 만큼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상 내더라도 누가 말리지 않습니다.”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이날은 한 해 동안 법회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법회 때 마다 소재가 다르고 강조점은 차이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뉴턴이 사과가 툭 떨어지는 걸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뉴턴이 사과 하나 떨어지는 걸 봤다고 음 이게 만유인력 때문이야. 그랬겠습니까?
아니죠. 사과가 왜 떨어지지? 왜 밑으로 떨어질까? 왜 그럴까?
모르겠는데, 정말 모르겠는데…. 왜지? 이렇게 의심하고 묻고 또 묻지 않았겠습니까?
실제 뉴턴은 그걸 묻느라 낮도 밤도 없었고 밥먹는 것도 잊었다고 합니다.
그건 뭡니까? 이게 뭔가, 왜 그런가? 간절한 마음으로 물은 겁니다.
마음공부도 다르지 않습니다. 경허스님께서도
‘고양이가 쥐를 잡듯, 어미 닭이 알을 품듯이’ 간절히 물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간절한 물음이 끊어지지 않아 그 물음 자체가 내가 되는 것이 화두고 공부입니다.
그러니 이게 선방에 앉아 가부좌를 틀어야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머리 깎고 승복 입은 사람들만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밥을 먹다가도 왜 우리는 밥을 먹나? 이 밥 먹어서 뭐하려고 하나?
운전을 하면서도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내가 내 차의 운전대를 쥐고 있듯이 내 인생의 운전대를 제대로 쥐고 있는 건가? 라고 물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단지불회’(但知不會), 다만 아는가 알지 못함을.
스님이 법회 동안 시종일관 이야기하는 것은 이 한 마디에 다 담겨 있다.
“우리가 괴로운 까닭은 우리의 업 때문입니다. 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운 정보와 지식,
그리고 경험해서 받아들여진 것의 총체가 바로 업입니다.
업이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마음공부는 그 업으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금강경에서 얘기하듯
우리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 사상(四象)에 의지해 살고 있습니다.
이 사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그동안 갖고 있던 습관과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관념,
내가 익혀서 오래동안 간직하고 있던 모든 정보와 그 정보를 통해서
판단했던 모든 사유의 습관으로부터 벗어나자는 겁니다.
그 정보로부터 만들어진 지식이라는 것, 나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는 겁니다.
바로 전도망상이며 업만 증장시키는 앎의 세계가 아니라 모름의 세계,
물음의 세계로 가자는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아는 것으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해 왔는데
그것이 과연 인간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불안으로부터 해방시켰는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거꾸로 모름의 세계, 의심의 세계로 가면서 끊임없이
왜 그런지를 묻고 또 묻자는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더러 자유로워지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이겠습니까. 바로 중생의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겁니다.
자기가 익히 아는 것, 그것이 업이니 그 업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하신 겁니다.
아는 것에서 벗어나려면 모르면 된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너와 내가 어디 있고,
이것 저것이 어디 있으며, 모르는데 분별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다시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버들은 왜 푸른가, 꽃은 왜 붉은가?’ 우리는 모릅니다.
‘나는 뭘까? 왜 살까?’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묻자는 겁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모르고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생의 길을 가면서 왜 가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물어야 하는 겁니다. 왜 그런지 의심하는 겁니다.
왜 그런가 묻고 의심하는 것이 공부입니다.
간절하게, 진실하게 묻는 것 그 자체가 수행이지 다른 게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