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여향 2010. 7. 23. 08:22

일주문을 지나 올라 가면

대웅전 보다 먼저 보이는 울금바위

개암사는 두번째이지만

이번에도 이 바위에 있다는 동굴은 못가보고 왔습니다

 

올라서면 대웅전이 보이네요

처음 갔을때는 한창 보수 공사 중이였었는데 지금은 말끔

 

 현판 위 양쪽에 사자인지 호랑이인지~~~

 

스님 뒷모습은 초상권 침해 아니겠지요?

 

못가봐서 못내 아쉬운 울금바위에 대한 얘기

(불교 신문에서 펌)

 

두개의 바위가 우뚝 솟았는데 토막을 내 갈라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절 이름이 개암(開巖)이다.

백제 무왕 35년(634) 묘련왕사(妙漣王師)에 의해 창건됐다.

‘우금’은 ‘임금 우(禹)’에 ‘쇠 금(金)’을 쓴다.

옛 사람들은 임금의 얼굴은 용안(龍顔), 입은 금문(金門)으로 높여 불렀다.

결국 바위는 왕의 입인 셈인데 멀리서 봐선 뜻을 실감할 수 없다.

소나무가 무성한 산길을 따라 30분 정도 오르면 바위의 정체가 드러난다.

커다란 구멍 두 개가 파였다.

하나는 집채만 하고 다른 하나는 창고만 하다.

창고만한 구멍은 크기와 깊이 면에서 아무래도 열세다.

‘큰것’만이 역사에 발붙일 수 있었다.

집채만 한 구멍의 이름은 원효굴이다.

 

원효대사가

나라를 잃어버린 백제 유민들에게 위로의 설법을 했다는 전설을 지녔다.

백제부흥운동 당시 저항군을 지휘했던 복신(福信)이 기거했다는 의미로

복신굴이라고도 한다.

부흥운동의 근거지였던 우금산성의 잔해라는 것이다.

산길엔 성벽의 일부였는지 아니면

자연적인 현상인지 모를 돌무더기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임금의 구강’은 서늘했다.

전반적으로 어두웠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이 워낙 밝아

사물을 식별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바깥은 시시껄렁한 초목들뿐이었지만

CG처리한 광고화면처럼 따스하고 신령스러웠다.

글을 쓰기에 적합한 채광과 온도, 거기다 환상까지 갖춘 셈이다.

<사진> 부안 개암사 대웅보전 위로 보이는 우금바위.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항전지로 전해진다.

<발심수행장>을 집필한 장소가 바로 이 곳이었으리란 추측이 들게 하는 풍물이다.

누군가 자그마한 마애불을 가져다 놓고 기도를 올린 흔적이 있다.

글을 쓰건 소원을 빌건 여하튼 꿈꾸기에 좋은 공간이다.

절에서 나던 포클레인 소리가 두 배쯤 증폭돼 귓전에 꽂혔다.

왕의 입은 연신 밭은 가래를 길어 올리며 낑낑거렸다.

폭발에 뜯겨나간 듯한 밑동에 기대어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한 우금바위는

운명의 현신 같았다.

예정된 패배를 가르치며 한껏 겁을 주는 모양새다.

한편으로는 시간을 좀 줄 테니 한번 용을 써보라는 격려로도 읽혔다.

무엇보다

‘어떤 선택을 하든 내 시선과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운명의 거드름이 느껴져 불쾌했다.

개암사는 변산반도의 동쪽에 위치했다.

변산반도는 전라북도 서남부에 톱니바퀴처럼 튀어나온 땅이다.

북동쪽의 동진강에서 남서쪽의 반도해안 끝까지 90㎞의 길이로 늘어졌다.

동쪽은 김제시와 정읍시, 북쪽은 부안만, 남쪽은 곰소만, 서쪽은 황해에 접한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지역을 외변산, 내륙지역을 내변산으로 나눈다.

넓이는 부안군의 면적과 거의 일치한다.

바다는 억겁의 세월 동안 육지를 할퀸 대가로 적잖은 보상을 치렀다.

반도의 동부는 호남평야의 일부로 광활한 곡창지대를 형성했다.

서부는 노령산맥에서 분리된 산괴(山塊)인데

모래해안과 암석해안이 어울려 운치가 뛰어나다.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여기를 발판으로 재기를 도모했다.

동진강을 따라가면 옛 수도였던 웅진성(공주)과 사비성(부여)을 만난다.

그러나 끝내는 이 물줄기가 백제의 숨통을 끊었다.

기벌포가 지금의 동진강변이라는 가설이 맞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