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明속의등불~★/洗 心 說(법문)

해탈․열반 향해 쉼없이 수행해야 불제자-법륜스님

진여향 2009. 10. 6. 15:06

해탈․열반 향해 쉼없이 수행해야 불제자

오늘 주제를 요약하면 ‘일상생활 속에서 행복해지자’입니다.

수행이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내가 있는 곳,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것이 수행입니다.

대부분 중생들은 자기입장에서 말하는데 그 한번의 집착을 끊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음식의 경우 그 집착을 극단적으로 고치기 위한 것이 단식입니다.

음식을 적게 먹는다고 해서 그 음식에 대한 집착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단식하면 며칠 동안 죽을 것 같은데

그 고비를 넘기면 음식에 대해 자유로워 질 수 있습니다.

제가 70일 동안 단식을 했었는데 단식하면 몸에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일상적으로 먹을 때는 몸에서 에너지를 대충 소비해 버리지만

단식할 때는 몸이 알아서 에너지를 아주 효율적으로 씁니다.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살려고 합니다.

음식이 몸에 필요한 것과 내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음식이 약이 될 것이라 고 생각하는 것은 습관(習慣) 즉, 업식(業識)입니다.

곤히 잠이 든 사람과 온갖 악몽을 꾼 사람의 경우

잠을 자는 동안의 에너지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듯

단식을 하더라도 심리적인 차이에 따라 에너지 소비가 다릅니다.

지금 먹는 음식의 반을 줄이더라도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건강에 좋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생들은 음식 줄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좋은 줄은 알지만 현실에서는 안됩니다.

이유는 까르마(업), 욕심, 그 습관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에서 공부해야 합니다.

고행을 통해 어느 정도의 길에 이르면 업식에 끌리지 않습니다.

산해진미가 있더라도 자신의 먹을 양만큼만 먹게 되는 것입니다.

몸이 습관에 길들여지면 버리기 어렵습니다.

먹는 습관을 비롯해 잠자리 등

모든 사회생활에서 삶의 등급을 높였다가 내리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입니다.

문명이 발전하다보니 자꾸 과소비 현상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출가해서 수행정진하면 더 빨리 깨달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출가의 마음, 자신의 견해만 확실하다면 세속에서 정진해도 됩니다.

부처님 법에 대한 믿음, 의지가 뛰어나면 굳이 출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가불자들은 출가 수행자보다 수행이 더욱 철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적 영향에 놓여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사에 보시만 하면 불교신자라고 흔히 말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제자와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해탈과 열반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세속을 떠나면 출가수행자가 되고,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하면 재가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형식의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정진을 할 때 출가수행자와 재가수행자 가운데 누가 발심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에 사는 재가수행자들의 발심이 더 높아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통제할 수 없을 때는 오히려 출가를 해야 된다고 봅니다.

자기가 자기자신을 절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깎고 수행복을 입혀 놓으면 그래도 남의 눈치는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타인에 의해서라도 계율을 지키게 된다는 말입니다.

“재가 수행자 사회적 영향에 쉽게 노출 자기 절제 능력 저하 수행에 철저해야”

“깨달음 과정서 마장의 유혹 이겨내면 자유스럽고 스스로 마음 제어도 가능”

흔히 불자들은

‘스님들은 수행자니까 그렇게 해야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절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이 조석예불 하듯이

불자들도 집에서 예불을 올리면 됩니다.

그러나 불자들은 세속에서 경계에 더 끄달리기 때문에 더욱 정진해야 합니다.

준비된 마음 없이는 헤매는 줄도 모릅니다.

이 때문에 불자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정진해야 합니다.

절에서 정진하는 것은 당연하고 집에서도 정진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부처가 되고자 정진하는 것입니다.

나를 경계하고, 나를 가다듬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고,

내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정진하는 것입니다.

습에 끄달리면 내 인생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음식을 과식하면 안된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그 약속은 안 지켜집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자기 인생에 있어 자기가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자기 주인도 절제하지 못하면서 남을 절제시키려고 합니다.

남을 절제하기 앞서 우선 나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내 맘대로 안되는 것은 내 까르마, 즉 업식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주인이 아닌 내 업식, 습관이 주인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끊고자 마음먹지만

‘내가 담배를 끊어봐야 몇 년이나 더 살겠어’라고 자기합리화하며 생각을 바꿔버립니다. 결국 그 습관이 주인노릇을 해 버립니다.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잔소리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늦게 귀가한 남편을 보는 순간 그 습관이 뛰쳐나와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좋은 말로 받아줘야지 다짐했지만 그 소리가 안 나옵니다.

그동안 살아온 습관이 자동적으로 잔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닌 업식이 주인이 됐기 때문입니다.

업식의 노예가 굴러가는 것이 육도윤회입니다.

업식은 항상 경계에 일어납니다.

경계를 탓할 것이 아닌데, 그리고 모두가 다 자기 업식인데

항상 인생에서 남 탓만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 문제인데 남의 문제로 돌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전도(顚到), 《반야심경》에선 전도몽상(顚到夢想)이라고 합니다.

원리전도몽상(遠離顚到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

전도몽상에서 벗어나 내 탓인 것을 알아차리면 고뇌가 사라져 마침내 열반에 든다.

즉 완전한 행복에 든다는 것입니다.

수행은 내가 경계에 끄달리느냐, 끄달리지 않느냐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찰나에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찰나 찰나에 깨어있는 것입니다.

수행할 때 고비가 있습니다.

‘그만 둘까. 꼭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등 마장이 계속 방해를 놓습니다.

단식에서도 3~5일께 죽을 것 같은 고비가 찾아오는데 이 마장을 넘겨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작심 3일’이라고 얘기하듯 대부분 3일을 못 넘깁니다.

그 순간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가짐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하다가 몸이 아프면 병원에 다니면서라도 기도를 해야 합니다.

100일 기도를 하기로 약속했으면 죽음 힘을 다해 그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그야말로 지금처럼 고만고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대중들 모두가 불만을 가지고 삽니다.

기도를 하다가도

‘지금까지도 잘 살았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라며 그 고비를 놓아버립니다.

깨달음의 순간까지 왔다가 깨닫지 않겠다고 발버둥치는 꼴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자들은 그 고비를 이겨내고 맛을 봐야 합니다.

그 고비를 넘겼을 때 자유스러울 수 있고, 스스로 마음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뿐 아니라

하기 싫은 것으로부터도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거기에 속박을 받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기 싫은 것으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여러분들의 자유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