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무 스님 -
많은 불자들이 절에 와서 부처님께 복을 빌고 소원성취하기를 바랄 뿐
정작 부처가 될 생각도, 노력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가 그지없습니다.
불교란 범부의 몸으로 성현이 되는 도리입니다.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한 생각 돌이켜 깨달으면 부처가 되는 것임에도 범부들은
우주에 충만한 부처를 보지 못하고
중생구제를 위해 사람의 몸을 빌어 잠시 나투신 눈앞의 부처님만 보고
복과 소원성취만을 빌고 있으니 실로 딱한 노릇입니다.
마음은 본래 물과 같습니다.
물은 주변 상황에 따라 얼음이 되기도 하고, 수증기가 되기도 하지만,
물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 또한 한결 같이 변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곧 불성입니다.
물과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성을 찾는 것이 수행입니다.
부처님을 보기만 하면 복을 빌고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것은 욕심이지 수행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아무리 기도를 한들
탐욕만 더할 뿐이지 공덕은 쌓아지지 않고, 업장 또한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수행을 하려면 복도 버리고 소원성취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얻으려고만 할 뿐 버리지 못하면 병(病)이 되는 것을 모릅니다.
‘변비’라고 하는 병도 따지고 보면 먹기만 하고 버리지 못해 생기는 병입니다.
버리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순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닷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비가 되고,
비는 강물이 되어 마침내 바다로 되돌아갑니다.
버릴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한 수행자입니다.
집착도 버리고, 성냄도 버리고 탐욕도 모두 버린다면 누구나 훌륭한 수행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육조 혜능스님은 나무꾼 시절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깨치셨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는 뜻으로,
번뇌 망상을 버리고 어떤 모양이나 사상에 개의치 말고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다 청산해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나옹화상의 오도송에도 이 같은 마음이 잘 담겨있습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그러나 우리는 버리는 것보다 얻는 것에 더 익숙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깨달음’조차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방에서 수행하는 납자들에게 일러주는 수행 간 유의사항에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수행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닦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은 늘 밝게 빛나고 있으며 진실은 이미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애써 닦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은 ‘얻는 것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수행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게 어긋나 버립니다.
번뇌와 망상, 탐욕을 비우고 버리는 속에서 문득
본성 광명이 그대로 밝게 비추고 있음을 직시할 때 바로 깨치는 것입니다.
<달마혈맥론>에 “부처를 지니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염(念)하지 말라.
부처는 경(經)을 읽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戒)를 가지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지킴도 범함도 없으며, 선과 악을 짓지도 않는다.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곧 부처일 것이다.
성품을 보지 못한 채 염불을 하거나 경을 읽거나 재계를 지키거나 계를 지킨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
염불은 왕생의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며,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스런 과보를 받거니와 부처는 끝내 찾을 수 없느니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수행을 하면서 수행을 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나는 수행한다.’는 상(相)을 갖게 되고 너는 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빠져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일체 번뇌로부터 해탈하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인데
또 다시 수행에 묶여 버리는 어리석음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성품의 참 모습은 본래 나와 너도 없고, 오고 감도 없으며, 늘어남과 줄어듦도 없으니,
먼저 성품을 보지 않고서는 무엇인가 얻으려는 생각, 공덕을 쌓아 간다는 생각을 여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성품을 보지 못한 수행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결코 도에 이를 수 없으니
어디에도 걸림 없는 참 성품을 보아야 무위(無爲)의 행(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이란
물 위에 비친 달빛이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것처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난제(難題)는 모두 가지려고만 하고 버릴 줄 모르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연의 섭리는 얻고 버리는 가운데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풀과 나무들이 버리는 맑은 산소로 동물이 생명을 이어가고,
동물이 버리는 이산화탄소로 식물이 살아갑니다.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니듯이 ‘얻는 것’과 ‘버리는 것’ 또한 둘이 아닙니다.
참으로 버림으로써 참되게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마당에 비친 대나무 그림자는 그 자취를 남기지 않고 마당을 쓸 듯이
우리의 마음 깊이 잠들어 있는 삼독심(三毒心)을 아무 흔적 없이 버려야 합니다.
또한 참된 수행을 하려면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한 행동이 악한 것인지 선한 것인지는 내 마음이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모르고 짓는 죄가 알고 짓는 죄보다 더 크다”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르고 짓는 죄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몰라 참회할 수 없으니
죄는 눈덩이처럼 굴러갈수록 자꾸 커지기 때문입니다.
도둑놈이 왜 밤중에 몰래 다니고, 죄를 짓고 경찰에 잡힌 사람들이 왜 얼굴을 가립니까?
모두 자기 마음에 부끄러운 줄은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어서 만년(萬年)의 세월도 부족하지만
인생은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저 잠깐일 뿐입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많은 시간이 남아있는 듯하지만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보면 그것은 눈 깜빡하면 지나가는 찰나간이요,
그저 숨 한번 내쉬고 들이 쉬는 호흡지간(呼吸之間)에 불과한 것이 인생입니다.
물은 분별하지도 않고 욕심을 내지도 않습니다.
흘러가다가 막히면 돌아갈 뿐이고, 고이면 그저 머무를 뿐이지 이를 가지고 분별하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또한 빨리 가려고 애쓰지도 않고, 늦는다고 조바심을 내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온갖 더러움이 물에 버려져 악취가 넘쳐나도 깨끗하기 위한 자정의 노력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물은 맑고 깨끗함, 그 원대한 포용력을 지니면서도 결코 우쭐대거나 자랑할 줄 모르고
오직 낮은 곳을 찾아다닐 뿐입니다.
손등과 손바닥은 하나입니다.
손등은 손바닥을 보지 못하여 서로가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범부의 삶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생각을 돌이키면 손등과 손바닥이 서로 하나임을 알듯이
미망(迷妄)에 잠들어 있는 우리 마음을 일깨우기 위한 참된 수행에 더욱 더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無明속의등불~★ > 洗 心 說(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강경의 시작과 끝이-해월스님 (0) | 2010.05.20 |
---|---|
[법륜 스님의 지혜로운 삶] 사업이 잘 안 돼요 (0) | 2010.05.14 |
시기 질투하지 말고 수희 찬탄하라-혜국스님 (0) | 2010.03.26 |
[법륜 스님의 지혜로운 삶] 남편과 도반이 되고 싶어요 (0) | 2010.03.10 |
[지광 스님의 가피이야기] 기도로 내면의 악 항복 받으라 (0) | 2010.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