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모르고 하는 공부 무명만 도울 뿐”
싱거운 말 한마디 하겠습니다.
아까 차를 마시다가 나눈 말인데..
농담 같지만 실제로는 진담이기도 합니다.
공부 공부 하지만 공부는 아무나 합니까!
또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아무나 됩니까!
무서울 정도로 무한히 애썼는데도 성취하려는 공부는
이루지 못하고 병만 성취하는 수가 많지요.
어째서 그럴까요. 지혜가 없었다는 겁니다.
애쓰는 행도 있어야 하지만 바로 아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지식분별의 세속적인 지혜가 아니고
지식분별이 끊어진 지혜입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세속적인 지식을 유지(有知)의 지(知)라고
하면 사량분별이 끊어진 지(知)는 무지(無知)의 지(知)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공부라고 하니 무엇이 공부이겠습니까!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무엇을 하든 하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서
자기 마음의 정체를 확인하고 일상생활 속의 천차만별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마음이 물들지 않도록 생활해 나가는 것을
공부라고 합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도 미심수도(迷心修道).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하는 공부는
무명만 도울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듯이
제일먼저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마음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달마대사 왈,
“나에게 물었을 때 그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요.
내가 너에게 답을 했을 때 이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니라.”
이 마음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한번도 생(生)하고 멸(滅)한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이 마음을 바로 봐야지
바로 보지 못하고 이 마음 밖으로 부처와
진리가 있다하고 찾는다면 잘못된 생각이오.
굳이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 부처와 진리가 어디 있는 고!
또 말을 이어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 한다면
잡을 수 있느냐! 허공이란 이름만 있고 모양이 없으니
잡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마음도 형체 모양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나
떠날 수도 없는 것이니 자기가 마음이기 때문이다.
부처란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것이지 마음을 깨닫지 않고
밖으로 찾는다면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법문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디까지나 우리들 자신을
가리킨 말이 아닙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 있는 자가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뜨거운 것이 오면 뜨거운 줄 알고,
소리가 나면 소린 줄 알지요. 이 아는 놈을 영지(靈知)라 하고
이 영지를 가리켜 바로 깨닫게 하는 것을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일체 중생들이 모두가 부처님과 똑 같은
지혜덕상(智慧德相)을 갖추어 있는데 다만 망상 집착에
사로 잡혀서 모르고 헤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이런 소리를 우리는 수 없이 듣고 알고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깨달음에 연결되지 않는 것은
사량분별의 유지라는 구름 속에서 알고 있기 때문에 상쾌하고
시원할 리가 없지요. 깨달음이란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사량분별의 유지라는 구름을 자기의 영지의 힘으로 헤쳐 버리고
유지의 지가 무지의 지로 바뀌었을 때 이 때 전개된
모든 바람소리 새소리가 무생(無生)의 법문이고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것이 진리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 공부 인이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던
유지(有知)의 지를 화두공안을 통해서 철저히 부숴 버리고
무지의 지에 도달하자는 것입니다.
싱거운 말 한마디 하겠습니다.
아까 차를 마시다가 나눈 말인데..
농담 같지만 실제로는 진담이기도 합니다.
공부 공부 하지만 공부는 아무나 합니까!
또 공부를 한다고 해서 아무나 됩니까!
무서울 정도로 무한히 애썼는데도 성취하려는 공부는
이루지 못하고 병만 성취하는 수가 많지요.
어째서 그럴까요. 지혜가 없었다는 겁니다.
애쓰는 행도 있어야 하지만 바로 아는 지혜도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지식분별의 세속적인 지혜가 아니고
지식분별이 끊어진 지혜입니다.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세속적인 지식을 유지(有知)의 지(知)라고
하면 사량분별이 끊어진 지(知)는 무지(無知)의 지(知)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공부라고 하니 무엇이 공부이겠습니까!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고 무엇을 하든 하고 있는 자신을 돌이켜서
자기 마음의 정체를 확인하고 일상생활 속의 천차만별의 환경에
적응하면서 마음이 물들지 않도록 생활해 나가는 것을
공부라고 합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도 미심수도(迷心修道).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하는 공부는
무명만 도울 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듯이
제일먼저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마음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달마대사 왈,
“나에게 물었을 때 그것이 바로 너의 마음이요.
내가 너에게 답을 했을 때 이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니라.”
이 마음은 끝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한번도 생(生)하고 멸(滅)한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이 마음을 바로 봐야지
바로 보지 못하고 이 마음 밖으로 부처와
진리가 있다하고 찾는다면 잘못된 생각이오.
굳이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 부처와 진리가 어디 있는 고!
또 말을 이어 “어떤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잡으려 한다면
잡을 수 있느냐! 허공이란 이름만 있고 모양이 없으니
잡을 수 없고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마음도 형체 모양이 없으니 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으나
떠날 수도 없는 것이니 자기가 마음이기 때문이다.
부처란 자기 마음을 깨닫는 것이지 마음을 깨닫지 않고
밖으로 찾는다면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법문을 듣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디까지나 우리들 자신을
가리킨 말이 아닙니까 사람뿐만 아니라 생명 있는 자가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뜨거운 것이 오면 뜨거운 줄 알고,
소리가 나면 소린 줄 알지요. 이 아는 놈을 영지(靈知)라 하고
이 영지를 가리켜 바로 깨닫게 하는 것을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일체 중생들이 모두가 부처님과 똑 같은
지혜덕상(智慧德相)을 갖추어 있는데 다만 망상 집착에
사로 잡혀서 모르고 헤매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이런 소리를 우리는 수 없이 듣고 알고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깨달음에 연결되지 않는 것은
사량분별의 유지라는 구름 속에서 알고 있기 때문에 상쾌하고
시원할 리가 없지요. 깨달음이란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사량분별의 유지라는 구름을 자기의 영지의 힘으로 헤쳐 버리고
유지의 지가 무지의 지로 바뀌었을 때 이 때 전개된
모든 바람소리 새소리가 무생(無生)의 법문이고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든 것이 진리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 공부 인이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고 있던
유지(有知)의 지를 화두공안을 통해서 철저히 부숴 버리고
무지의 지에 도달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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