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明속의등불~★/洗 心 說(법문)

[스크랩] 건너다보지 말아라/우룡스님

진여향 2009. 3. 24. 21:05

***생사 일여의 세계로***
    *건너다보지 말아라* 자주 부탁드리는 말씀이지만, 불자들은 남을 건너다보면 안 됩니다. 건너다보지 마십시오. 남을 건너다보면 언제나 실망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을 건너다보면 언제나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속지 마십시오. 언제나 근본 불성(佛性)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찰의 입구에 있는 산문(山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此入門者(차입문자) 莫存知解(막존지해) 이 문에 들어오는 자는 지해(알음알이)를 두지 말라. 깨달음의 집안, 부처님의 집안인 불교 문중에 들어오고자 하면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 알음알이, 분별의식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쉬운 이야기같지만, 알음알이를 두지 말라는 뜻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뇌나 망상을 두지 말라는 의미와는 다릅니다. 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주관과 객관에 대한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을 하다 보면 '관세음 보살'에 대해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와 염불의 대상인 '관세음보살'로 둘이 나누어지게 됩니다. 이를 불교 용어로는 능(能)과 소(所)라고 하는데, 능은 주관이요 소는 객관입니다. 곧 주관과 객관이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뭐꼬?'라는 화두를 들고 있을 때도, '이 뭐꼬' 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주체가 있고, '이 뭐꼬'라고 하는 대상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주체와 객체, 능(能)과 소(所)가 벌어지면 못 쓴다,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막존지해'에 담긴 의미입니다. 화두를 하면 화두 하나에, 염불을 하면 염불 하나에 똘똘똘 뭉쳐져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든 지장보살을 부르든 이 뭐꼬를 하든, 결코 '주관과 객관을 나누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이것이 이 문중에 들어오면 지해를 두지 말라(此入門者 莫存知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계속 알음알이, 곧 분별심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염불을 하는 것 같고 화두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화두도 염불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에 놓일 뿐입니다. 실로 대우주 자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주관과 객관이 벌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동시에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지지 않은 '나'는 곧 대우주 자체입니다. 대우주 자체가 곧 그대로 '나'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나요 내 마음'이라고 하는 그것은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잡을 수도 없고 떨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나요 내 마음'입니다. 모양도 없고 잡을 수도 없는 여기에 무슨 부처가 있고 중생이 있겠습니까? 이떠한 알음알이도 여기 에는 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들어오려 면 지해(知解)를 두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대우주 자체에 갖추어져 있는 본래 모습 그대로 똘똘똘 뭉쳐져 있어야 할 뿐, 달리 의식을 움직여서 망상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주관과 객관을 나눕니다. 먼저 물질세계인 몸과 정신세계인 마음을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물질세계에 주춧돌을 두면서 이것 저것을 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불교의 문중에 들어온 사람들은 지해를 두지 말아야 합니다. 분별하거나 쪼개는 것이 아니라 염불 하나에, 화두 하나에 똘똘똘 뭉쳐져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건 '지장보살'을 부르건 '이 뭐꼬'를 하건, 똘똘똘 뭉쳐져서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합니다. 몸이 조용할 때는 되고 몸이 움직일 때는 안 되고....이렇게 조각이 나서는 안 됩니다. 먼저 몸을 움직일 때나 몸이 조용할 때나 한결같이 한 덩어리가 되는 동정일여(動靜一如)가 되어야 합 니다. 그 다음 단계가 어묵일여(語默一如)입니다. 흔히들 말을 하지 않을 때에는 염불이든 화두든 한 덩어리가 잘 되는데,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에는 화두가 도망을 가거나 염불이 뚝 끊어져버리는 상태 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더욱 부지런히 애를 써서 말을 할 때나 침묵하고 있을 때나 한결같은 어묵일여의 경지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낮 시간에 잘 끌고 가다가 밤에 잠을 잘 때 뚝 떨어져버리는 고비를 넘겨서, 활동할 때 처럼 잘때도 한결같이 공부가 되는 오매일여(寤寐 一如)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목숨이 다하여 이 몸뚱어리가 떨어져 나가고 그 다음의 새로운 몸을 받을 때까지도 한 덩어리로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생사일여(生死一如) 라고 합니다. 낮 시간에 움직이거나 대화를 하거나 밥을 먹거나 하는 동안에는 염불이나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연결이 되는데, 잠을 자는 동안에는 끊어진다면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잠자는 속 에서도 염불이나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될 만큼은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몸뚱어리 끝나고 다음에 새 몸뚱어리 얻을 때까지 연결이 됩니다. 출가 승려도 아닌, 사회생활을 하는 분들에게는 참으로 어려운 수행이지만 하시면 됩니다. 하지 않기 때문에 되지 않을 뿐, 꾸준히 하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실제 머리를 깎은 스님네들도 잘 되는 분이 드뭅 니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하고자 하는 분들께 '절대로 그쪽을 건너다보지 말라'고 합니다. 좋은 말 많이 하고 좋은 법문 많이 들으면 혀와 귀는 극락세계로 가겠지만, 나머지는 업따라 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남이 지옥을 간다고 나도 따라서 지옥을 갈 수는 없습니다. 남이 지옥을 가든지 말든지,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됩니다. 그것이 극락 가는 길입니다. 옆을 쳐다 보고 '아이고, 스님네도 저러 는데'하다가는 내 신세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지식은 멀리서 친견하라'고 했습니다. 모습을 직접 쳐다보면 신심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 멀리서 기대를 갖고 법문만 잘 들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월간 [법공양]2월호에서-

출처 : 원효사
글쓴이 : 원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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