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아래 땅 위에 모든 것들을 삼라만상이라고 말한다.
삼라만상을 두고 불교에서는 흔히 말하는 범부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통칭한다.
우리가 보거나 혹은 보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말하는 종교가 불교다.
이러한 원리를 다 아는 분이 성인이다.
그래서 성인의 마음은 다 똑같다.
반대로 범부중생 마음은 조금이라도 자기의 마음과 가까울수록 그것을 두고 친하다고 한다.
모든 사물을 보는 눈이나 생각하는 일이 다 같으면 얼마나 좋겠나?
우리는 각각 따로 보고 따로 생각하고 따로 말한다.
부처님이 49년간 무엇을 설법했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원리와 이치를 자세히 말했다고 해서 ‘팔만사천가지’라고들 하지만
그 원리는 하나로 통한다.
그 원리를 다 아는 분이 성인이다.
우리 중생은 하나도 통하는 바가 없어서
날이 새고 밤이 새도록 자기 자신만 옳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산다.
세상은 그래서 시끄럽다.
부처님의 설법은 마치 ‘접었다 펼치는 부채’와 같다.
부채를 쫙 펴듯, 세상을 보면
상세하고 자세하고 남김없이 ‘억만중생 천차만별 중생’을 다 맞춰서 마치
아주 훌륭한 의원이 만사방의 병을 가진 이들을 처방한 것과 같다.
범부중생도 부처님법을 제대로 배워서 약방문을 찾아서 공부하면 ‘중생병’을 고칠 수 있다.
우리 범부들은 살면서 내내 푸념만 하고 한(恨)에만 맺혀 있다.
한을 풀 수 있는 방법은 부처님법에 있고 법문을 듣고,
들었으면 그것을 앉거나 눕거나 걷는 장소마다 그것을 실천하면 된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 삼라만상의 중심이 되고 핵심이 되는 것은 ‘마음 심(心)’자다.
그것을 제일먼저 제창한 분이 달마대사다.
달마대사는 여러가지 법문을 많이 했지만
관심론 사행론 등을 통해 마음을 주제로 마음을 핵심으로 설법을 했다.
우리가 하루에 생각하는 마음가지수가 얼마나 되는가. 천가지 만가지다.
그 숫자는 말로 계산이 안될 정도다.
그러하니 그 마음의 힘이 미약할까, 힘이 좋을까.
마음이 분산되면 힘이 없다. 마음이 하나로 집약이 되면 그 힘이 얼마나 셀까.
그 힘을 모으면 이 세상 폭탄중에 파괴력이 가장 심한 핵폭탄보다도 수천배 수만배 강하다.
그게 바로 우리 ‘마음’이다.
마음이 하나로 집약이 되어 터지면 그 힘은 온 우주를 안을 수 있고 파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 하나를 잘 다스리면 세상에 모든 것을 관찰하는 힘이 생긴다.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는 힘이 나온다.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염불하고 참선하고 절하는 법이다.
우리 불자들은 절에 와서 여러 가지 수행을 한다.
하기는 하되 벌로 하면 이익이 있는가? 없다. 투자는 했어도 이익이 없다.
나중에 ‘연말결산’할 때, 죽을 때 되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평소에 ‘주식투자’를 잘 해야 한다.
성지순례를 예로 들자.
성지순례의 의미를 모르면 진실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알면 진실한 행(行)이 나온다.
믿음을 바탕으로 제대로 알면서 실천에 옮길 줄 아는 신행과 수행이 돼야 한다.
이 절 저 절 생각없이 바삐 돌아다니면 그것이 수행이 될 턱이 없다.
탑돌이도 그렇다.
탑돌이의 의미도 모르고 정신없이 돌다보면 어떤 노인들은 어지러워서 주저앉기도 한다.
불보살님 삼보에게 무슨 은혜가 있을까 생각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하는 예경의 의미로 성지순례를 하고 탑돌이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불보살님에게 무슨 은혜를 입었는가.
부모로부터 육체적 은혜를 입었다면, 삼보는 정신적인 은혜를 입은 것이다.
법당에서는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부처님은 나를 낳아 키워준 부모님 은혜보다 크기에 내가 절을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공덕이 된다.
부모와 스승 부처님 앞에 몸을 숙이듯이 모든 자들에게
나를 숙이고 낮출 줄 알면 그 때 복이 되고 공덕이 된다.
복을 짓고 공덕을 닦는 것은 이런 원리를 앎으로 해서 공덕이 되고 복이 된다.
탑돌이도 마찬가지다.
부처님의 몸과 마음이 탑 안에 들어있다.
부처님의 주변을 도는 것은 정성과 수행의 극치다.
부처님께 배우려고 할 때는 부처님께 법(法)을 청하는 마음을 간절하게 하는 것이다.
탑을 100바퀴 도는 것보다 부처님의 몸과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가를 깨우치면서 도는 것이 더 낫다.
‘부처님을 알고 돌아라.’ 이 말이다.
요즘 선거철 후보자들을 보노라면 왜그리 허물이 많은지 모르겠다.
왜 말도 많고 탈도 많은가.
평소에 공경할 줄 모르고 하심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혼자 있으면 자기가 똑똑한줄 착각하지만 한번 동네 통반장이라도 나가봐라.
누가 자신을 찍어줄지 생각해보라.
내가 잘났다는 생각을 버려야 복이 된다. 그것을 유념해야 한다.
부처님의 마음은 지혜와 광명의 표본이며 부처님의 몸은 복덕의 표본이다.
지혜와 복과 공덕의 표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 자신의 몸과 마음은 무엇인가.
옛날 스님네들이 살 때
이 몸뚱이가 움직이는 것을 ‘화장실 똥통’이 왔다갔다 한다고 했다.
스님들은 제자들이 공부안하면 저 놈 ‘밥통’같은 놈, ‘밥버러지’라고 표현했다.
내 몸이 악업 덩어리임을 알아야 한다.
이를 알고 세상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내 몸과 마음을 살피면
수행과 기도, 염불이고 참선이다.
염불이나 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몰라도 좋다.
탑돌이 반바퀴도 안해도 상관없다.
자기 마음과 몸을 왕복하면서 끊임없이 살피고 살펴야 진정한 공덕이 된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탑돌이를 하면 공덕이 되지 않는다.
집에 있으면 끊임없이 내 자신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러한 마음을 갖고 부처님한테 법문을 듣기 위해 몇바퀴를 돌고 돌면서 간절하게 간청하는 표현이다.
그런 생각 없이 하루 열두번 절에 왔다갔다해도 공덕이 안되고
집에서도 몸과 마음을 탑돌이하듯 자꾸 살피면 그것이 공덕이다.
부처님에게 절하는 자세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면 그것보다 좋은 수행은 없다.
생명을 가진 자는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다.
지금이야 미물이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부처를 이룰 수가 있다.
직설로 말하자면, 오늘 내가 생명을 죽이는 것은 바로 부처를 잃는 행위이다.
부처님의 범위는 이렇게 크고 깊다.
우리는 살면서 복타령만 한다.
탓하다보면 끝도 없다. 그런 소견에 무슨 복을 받을까.
그 심보를 들여다보고 그 그릇을 보면 ‘종제기 복’밖에 안된다.
업장소멸은 내가 지은 죄를 알고 소멸하는 것이다.
내 업장의 양과 모양을 모르니까 계속 수행을 해서
내 업장위에 수행을 뒤집어 씌우면 악업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밑에 깔린 악업이 썩어서 복으로 변해버린다.
악업이 거름이 되어 복으로 돌아온다.
그것이 처방법이다.
자기 악업을 소멸시키면 복이 된다.
‘죄멸복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참회하고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탑돌이도 한다.
이 절 저 절 차타고 돌아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참회와 기도와 염불과 참선이 안으로의 수행이다.
밖으로는 탑돌이를 하고 선행을 베푸는 일이다.
복없는 내 자신을 진실한 마음으로 창피한 줄 알아라.
남 원망하는 그 마음을 반대로 돌려라.
진정으로 창피한 마음이 들면 이래서는 안된다는 새로운 마음이 든다.
참 내가 못났구나 하는 내면적 참회가 들어가야 한다.
탐진치에 의해서 근본적인 업을 짓는 근본의 뿌리를 뽑는 것이 열반이다.
불교의 궁극목적은 열반이다.
열반은 업장과 탐진치를 소멸하는 것이다.
소멸하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행해야 한다.
수행이자 불교의 근본핵심인
바른 소견, 바른 사고, 바른 말, 바른 몸의 자세, 바른 생활습관, 바른 정진 등이 기반이 돼야 한다.
오직 이세상에 잠시 머물다 떠날 때는 천만가지는 두고, 내 영혼만 갖고 간다.
돈과 권력에 기대지 않고 자신을 닦고 정진한 그 힘만을 가지고 떠나가는 것이다.”
부산=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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